비움도 비워내는 ‘끝장 사유’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86553.html
중론 용수. 경서원. 1993 김성철 옮김
⑴ 어순의 도치
⑵ 단어의 교체
⑶ 단어의 변형
⑷ 虛辭의 삽입
[고전다시읽기] 비움도 비워내는 ‘끝장 사유’
모든 실체화된 것은 깨부수고 변화 내지 변혁의 의지 속에서 동일성이나 불변성을 근본에서 전복하려는 사유라는 점에서 이 책은 너무도 현대적이다. 심지어 차이마저도 실체화되면 차이를, 결합과 변화를 사유할 수 없게 되리라고 경고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시간보다 차라리 한 걸음 앞서 있다고 해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접근의 장벽이 되는 최초의 어려움은 넘어설 만한 가치가 있음이 틀림없다.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
책에서 만나는 건 ‘공’마저 해체해 버리는 ‘극한적 사유’
자기 생각이나 신념을 ‘공’하다고 여김으로써 아집 버리고
다른 것과 상생을 도모하는 과격한 방법론 던져줘
용수(나가르주나)의 <중론>
어려운 책이다. 서평 때문에 읽으면서 두통이 생겨버렸다. 예전에 여러 번 읽은 것인데도. 책이 어려운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이 책이 어려운 것은 철학책에서 흔히 보게 되는 난해한 스타일 때문도 아니고, 쫓아가기 힘들 정도로 많은 지식이 동원되어 그런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 책이 통념에 반할 뿐 아니라 통념 전체와 대결하며 그것을 극한적인 방식으로 깨부수고 있기 때문이다. 간결하고 명료하지만, 우리 사고의 어떤 것도 그냥 두지 않는다. 그래서 어렵다기보다는 차라리 당혹스럽다고 해야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불교철학의 ‘중도적 사유’를 다루기에 ‘중관(中觀)’이라고도 불리는 이 책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극도의 ‘극한적 사유’다. 중도의 사유란 양쪽을 모두 고려하는 ‘세련된’ 중간적 사유가 아니라 차라리 ‘끝을 보는’ 극한의 사유임을 보여주는 셈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이미 지나간 것에는 출발이 있을 수 없다. 이미 지나간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지나가지 않은 것에도 출발은 없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니 어디 출발이 있을 것인가? 지나가고 있는 것에도 출발은 없다. 그 역시 이미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것도 출발은 없다. 출발하지 않은 것이 지나갈 순 없는 일이다. 따라서 어떤 것도 지나가지 않는다.” 아마도 이는 제논의 역설을 아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운동을 하나의 점으로 환원하려는 태도, 변화를 하나의 ‘원자적’ 사실로 환원하려는 태도에 함축된 역설이란 점에서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론>에서 역설은 이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이 책에 따르면 가령 인과(원인과 결과)라는 개념 자체도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면 원인은 원인이 아니고, 결과가 원인과 같다면 결과는 결과가 아니라 원인 그자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이 책은 있음과 없음은 물론이고 생성과 괴멸, 시간, 감각, 행동과 주체 등을 ‘해체’해버린다. 여기서 해체한다는 말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줌을 뜻한다. 그걸로도 모자라 있지도 않으며 없지도 않은 상태, 있으며 동시에 없는 상태 모두에도 해당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해체함으로써 그 모든 것의 본성이 ‘공(空)’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공(空)’은 있음(有)에 반대되는 개념인 없음(無)과 다르다. 그것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다. 이를 불교에서 흔히 유/무의 양 극단을 떠났다는 의미에서 ‘중도(中道)’라고 부른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백척간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라
여기서 용수가 사용하는 ‘해체’의 방법은 일종의 내재적 비판의 방법이다. 상대방의 주장이나 가정을 옳다고 가정한 뒤, 그 가정에 따라 추론해서 원래의 주장을 반박하는 결론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수학에서 사용하는 ‘귀류법’과 비슷하다고들 하기도 한다. 그러나 수학의 귀류법이 옳다고 가정한 것(가령 ‘…는 유리수라고 하자’)이 모순된 결론에 도달함을 보여주어 쉽사리 그 반대의 가정(‘…는 유리수가 아니다’)을 취하지만, 용수는 그 반대의 가정도 취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는 점에서 아주 다르다. 이다/아니다, 있다/없다 어느 것도 취할 수 없는 난감한 상태로 몰고 가는 것이다(이런 점에서 가정된 공리만으로는 참/거짓을 결정할 수 없는 명제가 어디나 존재함을 증명한 괴델의 정리와 차라리 더 가까운 것 같다). 수학적 귀류법이 확실한 것을 보여주는 방법이라면, 용수의 방법은 확실하다고 믿었던 모든 것을 해체해 버린다.
어쩌면 ‘해체주의’에서 사용하는 해체의 방법과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에게서 연유하며 데리다에 의해 ‘방법’으로 체계화된 ‘해체’는 간단하게 말하면 어떤 체계 내부에 존재하는 균열과 틈새를 드러내고 거기서 이율배반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행해진다. 해체주의는 그 이율배반을 통해 사유되지 않은 것을 끄집어내고 사유하고자 한다. 가령 선물이 선물임을 인식하는 순간 그것은 선물이 아니게 된다. 더구나 선물에 답례가 의무라면 더 그렇다. 이 경우 선물은 교환의 일종이 되게 되는데, 이는 선물의 대립물인 교환이 거꾸로 선물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로써 선물과 교환의 경계는 해체된다. 선물이란 선물이라고 할 수도 없고 선물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해체주의자들이 사용한 해체의 방법은 어떤 체계를 파괴하는 방법이라기보다는 그 균열을 야기하는 지점을 통해서 한층 깊은 기원을, 하지만 결코 현전(現前)하지 않는 기원을 찾아내고 그것을 통해 재구성하는 방법이다.
사실 읽기에 따라선 용수가 이 과격한 해체를 통해서 모든 것의 근저에 있는, 그러나 결코 그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공’이라는 ‘기원’을 찾아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보는 경우에도 이 책은 해체주의보다 훨씬 근본적이고 전면적이며 과격한 선구자라고 해야 한다. 여기서 용수는 심지어 속박과 해탈도, ‘무아(無我)’나 ‘여래(如來)’마저도 ‘공’하다고 주장한다. 이 점은 확실히 이 책을 유니크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남들의 주장을 비판하여 자신의 타당함을 주장하는 것이야 어디서나 발견되는 것 아닌가!(해체주의자들도 ‘해체’의 개념은 해체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불교사상가가 불교사상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조차 ‘공’하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집(我執)의 근본이 자기 생각이나 신념은 옳고 다른 이의 그것은 틀리다는 가정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자기 생각마저 공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야말로 ‘무아’ 사상의 요체라고 할 것이다. 용수의 극단적인 과격함은 사실 ‘무아’를 통해 자기와 다른 것과 상생하는 법을 가르치려던 불교 자체에 속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모든 분별의 전제를 내려놓고 아무 의지할 것 없이 백척간두에 서도록 몰아놓고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라고 밀어대는 선(禪)의 과격함과 마찬가지로.
용수는 그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자신이 모든 것을 해체하면서 수립한 ‘공’이란 개념조차 다시 해체해버린다. ‘공’조차 하나의 실체로 생각한다면 그것처럼 구제불능의 오류는 없다고 하며, 그래서 ‘공’마저 ‘공’하다고 선언한다. ‘공공(空空)’. 그런데 거꾸로 거기서 그가 ‘공성(空性)’을 통해 하려고 하던 바가 거꾸로 드러난다. 어떤 것도 실체화해선 안 된다는 것, 어떤 것에도 정해진 본성은 없으며 연기적(緣起的)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이는 ‘공’이란 개념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실체적인 것, 불변의 본성을 갖는 것이 사라짐으로써 모든 것은 가변성 속에 들어가게 된다. 변화를 만드는 행동이나 사유가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바로 그때다.
실체화된 것 깨부수는 변혁 의지
불교 교의의 요체인 사성제의 ‘공성’이 뜻하는 바도 이런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아마도 당시에 있었을) 흔한 비난처럼 그 가르침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공은 무가 아니다!). 여기선 사성제의 첫 번째 가르침인 ‘고(苦)’의 공성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고통이 정해진 본성을 갖고 변하지 않는 것이라면 고통은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고통의 원인인 ‘집착(集)’ 역시 불변의 본성을 갖는 실체라면, 집착의 소멸은 불가능할 것이다.
모든 실체화된 것은 깨부수고 변화 내지 변혁의 의지 속에서 동일성이나 불변성을 근본에서 전복하려는 사유라는 점에서 이 책은 너무도 현대적이다. 심지어 차이마저도 실체화되면 차이를, 결합과 변화를 사유할 수 없게 되리라고 경고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시간보다 차라리 한 걸음 앞서 있다고 해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접근의 장벽이 되는 최초의 어려움은 넘어설 만한 가치가 있음이 틀림없다.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
?중론? Śloka의 제작방식과 번역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김성철
1. 들어가는 말
2. Śloka 형식 개관
3. ?중론? Śloka의 제작방식
4. ?중론? Śloka의 바람직한 번역
5. 맺는 말
1. 들어가는 말
龍樹(Nāgārjuna: 150~250경)의 ?中論?(Madhyamaka Kārikā)이 난해한 것은 ?중론?에서 구사되는 ‘空의 論理’가 난해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론?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아비달마 교학이 난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중론?의 각 게송이 산스끄리뜨 정형시인 Śloka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 역시 ?중론?을 난해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
?중론?에서 그렇듯이, ‘언어와 사고에 의해 언어와 사고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至難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지적이 산문이 아니라 운문으로 작성되어 있는 경우 그 형식의 제약으로 인해 문장에 왜곡이 일어나기에 그 의미를 이해하기가 더욱 더 어려워진다. 따라서 ?중론?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용수가 Śloka라는 시형식에 맞추어 중관사상을 표출해 내기 위해 단어와 어순에 많은 조작을 가하며 ?중론?을 저술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중론?을 읽어야 한다. Śloka가 어떤 형식의 시이며, 이를 작성하기 위해 ?중론?에서 어떤 조작이 가해졌는지 명확히 파악될 경우 ?중론?을 誤解하거나 誤譯하는 일은 보다 적어질 것이다.
본고에서는 Śloka 형식을 빌어 ?중론?이 저술되는 과정에서 어떤 언어적 조작이 사용되었는지 검토함으로써 바람직한 ?중론? 번역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모색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일반적인 Śloka 시형식에 대해 개관하였다(제2장). 그리고 용수가 ?중론?을 저술하면서 Śloka 운율을 맞추기 위해 가한 음운적 조작들을 추출, 분류해 보았다(제3장). 그리고 이러한 예비지식에 근거할 경우 ?중론? Śloka에 대한 바람직한 번역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제시해 보았다(제4장).
2. Śloka 형식 개관
산스끄리뜨 시인의 작품(Kāvya)에는 散文(Gadya: prose)과 韻文(Padya: verse)이 있으며, 韻文은 네 개의 句(Pāda: quarter)로 이루어져 있다. 각 句의 길이는 拍子(Mātrā: syllabic instant, mora)의 수나 音節(Varṇā: syllable)의 수에 의해 결정된다. 운문의 韻律(Vṛtta: verse rhythm)은 크게 拍子韻(Mātrāvṛtta= Jāti)과 音節韻(Varṇavṛtta= Vṛtta)으로 나누어지는데, 拍子란 하나의 음절을 발음할 때 걸리는 시간을 나타낸다. ‘a, i, u, ṛ, ḷ’는 短音(hasva: short)이기에 오직 한 拍子만을 가지며, ‘ā, ī, ū, ṝ, ḹ, e, ai, o, au’는 長音(dīrgha: long)이기에 두 拍子를 갖는다. 또, 둘 이상의 자음이 겹치는 경우에는 그 앞의 모음을 장음으로 보며, 필요한 경우 句의 末尾에서는 단음을 장음으로 계산하기도 한다. 또 Anusvāra(ṃ)와 Visarga(ḥ)는 자음에 속한다.
산스끄리뜨 운문들 중 龍樹의 저술과 관계가 있는 것은 Śloka와 Āryā이다. Śloka는 Veda의 Anuṣṭbh(4×4調)에서 발달한 敍事詩 형식인데, 8음절 짜리 句(Pāda) 넷으로 이루어져 있는 총 32음절의 韻文이며, Āryā는, 첫째 句와 셋째 句는 12박자, 둘째 句는 18박자, 넷째 句는 15박자로 이루어져 있는 총 57박자의 韻文이다. ?廻諍論? 본송의 경우 70여 詩頌 모두가 57박자의 Āryā형식으로 작성되었으며, 약 450여 수에 이르는 ?中論頌(Mādhyamika Kārikā)?은 32음절의 Śloka형식으로 작성되었다.
Śloka는 크게 Pathyā(정상)形과 Vipulā(확장)形의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되며, Vipulā형은 다시 네 가지 형식으로 나누어지는데, 각 형식들의 운율은 다음과 같다.
Pathyā형
․․․․ ⌣--․ ․․․․ ⌣-⌣․
Vipulā형
․-⌣- ⌣⌣⌣․ ․․․․ ⌣-⌣․(①)
․⌣-- ⌣⌣⌣․ ․․․․ ⌣-⌣․(②)
․-⌣- -⌣⌣․ ․․․․ ⌣-⌣․(③)
․-⌣- -,--․ ․․․․ ⌣-⌣․(④)
(부호설명: ․ 長音이나 短音 모두 가능 / - 長音 / ⌣ 短音)
이상과 같은 예비지식에 토대를 두고 ?중론? 제2 관거래품 제1게의 운율을 분석해 보자.
gataṃ na gamyate tāvadagataṃ naiva gamyate/
gatāgatavinirmuktaṃ gamyamānaṃ na gamyate//(MK., 2-1)
단장 단 장단장 장단단단장 장단 장단장
단장단단단장장단 장단장장 단 장단장
⌣-⌣- ⌣--⌣ ⌣⌣-- ⌣-⌣-
⌣-⌣⌣ ⌣--⌣ -⌣-- ⌣-⌣-
이는 Pathya형 Śloka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게송의 전반부는 Vipulā형(④) Śloka이다.
sataśca tāvadbhāvasya nirodho nopapadyate/
ekatve na hi bhāvaśca nābhāvaścopapadyate//(MK., 7-30)
단장단 장장장장단 단장장 장단장단장
장장장 단 단 장장단 장장장장단장단장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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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론? Śloka의 제작방식
이상과 같은 형식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심오한 공 사상을 Śloka로 표출한 ?中論?이 저술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Śloka형식에 맞추어 ?중론?을 저술하려다 보니 피치 못하게 난삽, 난해한 문장들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약이 가장 적은 Pathyā형 Śloka를 제작할 경우에도 총 16음절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 중 제5, 6, 7 음절과 제13, 14, 15 음절만은 일정한 음절운(Varṇavṛtta)을 가져야 한다는 점만은 지켜야 한다. Śloka의 이런 형식적 제약을 어기지 않으면서 ?중론?을 저술하기 위해 용수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방법을 사용했던 것으로 조사된다.
⑴ 어순의 도치 ⑵ 단어의 교체 ⑶ 단어의 변형 ⑷ 虛辭의 삽입
그러면 이 각각의 용례를 ?중론?에서 찾아보자.
⑴ 어순의 도치
산스끄리뜨어의 특징 중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정해진 어순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 다음과 같은 규칙이 지켜진다.
① 주어는 문장의 처음에 놓이며, 동사적 술어는 문장의 말미에 두고, 그 양자의 중간에 다른 요소가 놓인다.
② 명사, 또는 그에 상당하는 단어에 의해 구성되는 명사문에 있어서는 주어와 술어의 위치가 자유로워서, 어느 것을 앞에 두어도 좋다.
③ 명사문에 있어서 asti, bhavati 등의 계사(copula)는 3인칭 이외의 인칭 및 현재 이외의 시제, 법의 의미를 분명히 나타낼 때를 제하곤 생략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Śloka를 보자.
na hi svabhāvo bhāvānāṃ pratyayādiṣu vidyate/
avidyamāne svabhāve parabhāvo na vidyate//(MK., 1-2)
실로 사물의 자성은 연 등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후반 게송 중 ‘avidyamāne svabhāve’는 처격의 絶對句(Locative absolute), 즉 절대처격으로 ‘자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원인), 또는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조건),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상황) 등으로 번역 가능하다. 그러나 절대처격의 경우 ‘명사의 처격 + 분사의 처격’의 순으로 배열되는 것이 원칙이기에 ‘svabhāve + avidyamāne’로 기술되는 것이 옳다. 이어지는 ‘parabhāvo na vidyate’라는 문장은 ‘주어 + 불변화사 + 동사’의 형식을 갖춘 지극히 정상적인 문장이다. 따라서 상기한 후반 게송은 다음과 같이 기술되었어야 옳다.
svabhāve ’vidyamāne parabhāvo na vidyate//
그러나 이 경우 sandhi(連聲)법칙으로 인해 avidyamāne의 ‘a’음이 소실되어 총 음절수는 15음절로 줄어들고 만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용수는 위에서 보듯이 ‘avidyamāne svabhāve’로 도치시켰던 것이다.
전반 게송의 경우도 다음과 같이 기술되는 것이 원칙일 것이다.
bhāvānāṃ svabhāvaḥ pratyayādiṣu na hi vidyate/
장장장 단장장 장단장단단 단 단 장단장
---⌣ ---⌣ -⌣⌣⌣ ⌣-⌣-
이 경우 역시 상기한 Śloka의 운율 중 그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기한 ‘MK., 1-2’의 전반 게송은 Vipulā형의 Śloka이다.
Śloka의 운율을 지키기 위한 어순의 도치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귀경게 중의 八不일 것이다. 용수는 不生不滅, 不常不斷, 不一不異, 不來不去의 팔불 중 前 四佛을 도치시킨다. ?중론? 귀경게 중의 팔불을 보자.
anirodham-anutpādam-anucchedam-aśāśvataṃ/(不滅不生 不斷不常)
anekārtham-anānārtham-anāgamam-anirgamaṃ//(不一不異 不來不出)
이 중 前 四不을 ?반야경?에서의 용례와 같이 ‘불생불멸 불상불단’이라고 기술한 후 음절운을 분석해 보자.
anutpādam anirodham aśāśvatam anucchedam(不生 不滅 不常 不斷)
단장장단 단단장단 단장단단 단장장단
⌣--⌣ ⌣⌣-⌣ ⌣-⌣⌣ ⌣--⌣
이 역시 상기한 어떤 형식의 Śloka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不滅→不生→不斷→不常’으로 도치시킬 경우 Pathyā형 Śloka가 된다.
이 이외에도 ?중론?의 거의 대부분의 게송에서 Śloka라는 정형시의 형식에 맞추기 위해 어순의 도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⑵ 단어의 교체
용수의 ?중론?에서는 관례에서 벗어난 불교용어가 사용된 게송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그 예 중 하나로 제4 관오음품 제7게를 들 수 있다. 다음을 보자.
vedanācittasaṃjñānāṃ saṃskārāṇāṃ ca sarvaśaḥ/
sarveṣāmeva bhāvānāṃ rūpeṇaiva samaḥ kramaḥ//(MK., 4-7)
受와 心과 想들, 또 諸行과 같은 모든 존재들은 모든 면에서 色과 아주 똑같은 절차를 밟는다.
?중론? 제4 관오음품에서 용수는 공의 논리를 구사하며 먼저 色蘊의 독립적 실재성을 논파한 후, 상기한 제7게를 통해 오온 중 나머지 네 가지 蘊(skandha)도 색온과 같은 방식으로 그 실재성이 논파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설한 후 ‘수상행식도 마찬가지다’(受想行識 亦復如是)라고 선언하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그런데 제7게에서 오온 중 색온을 제외한 나머지 4蘊 중 受, 想, 行은 관례적 용어로 기술되어 있는데 식온의 경우는 vijñāna(識)가 아니라 citta(心)로 기술된다. 寺本婉雅가 지적하듯이 원시불교에서는 citta(心)와 manas(意)와 vijñāna(識)이 같은 의미로 쓰였기에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vijñāna를 굳이 citta로 대체한 것은 Śloka 음절운에 맞추기 위한 조작으로 짐작된다. vijñāna는 3음절어이기에 음절운을 Śloka의 16음절에 맞추기 위해서는 2음절어인 citta가 사용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예는 제7 관삼상품에서도 발견된다. 아비달마 교학에서는, 초기불전에 기술된 삼법인 중 제행무상(sarve saṃskārā anityāḥ)의 교설을, ‘모든 유위법(saṃskṛtāḥ)은 생주멸한다’는 명제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여기서 ‘생․주․멸’은 각각 ‘jāti(生), sthiti(住), nirodha(滅)’로 표현된다. 이러한 생주멸은 유위법의 三相인데 이런 三相(tri-lakṣaṇī) 역시 유위법에 속하기에 다시 생주멸해야 하며, 그런 2차적인 생주멸을 三隨相(tri-anu-lakṣaṇī)라고 한다. 또 삼수상 각각은 다시 jāti-jāti(生生), sthiti-sthiti(住住), nirodha-nirodha(滅滅)이라고 명명된다. ?중론? 제7 관삼상품에서는 이런 삼상설이 범하게 되는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는데, 이 때 생을 jāti가 아니라 utpāda로 기술하고 있다. 그 한 예를 보자.
utpādotpāda utpādo mūlotpādasya kevalam/
utpādotpādamutpādo maulo janayate punaḥ//(MK.,7-4)
生生은 오직 根本的인 生의 生일 뿐이며
근본적인 생이 다시 생생을 생한다.
utpāda는 3음절어이지만 jāti는 2음절어이다. 이런 게송을 작성하면서 ‘生’을 표현하는 용어로 2음절어인 ‘jāti’를 사용했다면 Śloka의 16음절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제15 관유무품에서는 Śloka 형식에 맞추기 위해 svabhāva(自性) 대신에 prakṛti(本性)가 사용되기도 한다. 다음을 보자.
yadyastitvaṃ prakṛtyā syānna bhavedasya nāstitā/
prakṛteranyathābhāvo na hi jātūpapadyate//(MK., 15-8)
장장장장 단장장 장단 단장장단 장단장
단단장장단장장장 단 단 장장단장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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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이는 Pathyā형 Śloka이다. 그러면 여기서 prakṛti를 svabhāva로 대체하여 위 게송을 다시 기술해 보자.
yadyastitvaṃ svabhāvena syānna bhavedasya nāstitā/
svabhāvasyānyathābhāvo na hi jātūpapadyate//
이렇게 재구성된 게송의 경우 전반부든 후반부든 음절수가 17음절이 되어 Śloka 형식을 어기고 만다. 따라서 여기서 svabhāva(自性) 대신 사용된 prakṛti(本性)에 대해 독특한 의미를 갖는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상에서 보듯이 Śloka 작성을 위해 단어를 바꿔 쓴다는 점에 대해 무지할 경우, 우리는 citta와 vijñāna의 차이, utpāda와 jāti의 차이, prakṛti와 svabhāva의 차이에서 어떤 사상적, 사상사적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고심하는 헛수고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이외에 adhipati(增上) 대신 사용되는 adhipateya, gamana(去法)와 gati의 혼용, pra√dā(與: 주다)와 pra√hi(授: 넘기다)의 혼용 등도 이런 예들 중의 하나이다.
⑶ 단어의 변형
용수는 Śloka의 16음절을 만들기 위해 단어에 접두어를 첨가하기도 하고 의미에 큰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 단어와 결합시켜 복합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렇게 단어에 변형을 일으킨 예 중 대표적인 것이 귀경게 팔불 중 ‘不一亦不異’로 번역되는 ‘anekārtham-anānārtham’과 不出로 번역되는 ‘anirgamam’이다. 귀경게의 八不 중 後 四不은 다음과 같다.
anekārtham-anānārtham-anāgamam-anirgamaṃ//(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이 중 ‘不一不異’에 해당하는 ‘anekārtham-anānārtham’를 직역하면 ‘동일한 의미도 아니고 다른 의미도 아님’으로 번역되는데, 한역 ?順中論?에서는 ‘不一不異義’라고 번역하고 티베트역에서는 ‘tha dad don min don cig min’(非異義非一義)이라고 번역하는 바, 양자 모두 산스끄리뜨文에 쓰인 ‘artha’(義: 의미, 사물)의 의미를 살려 번역해 내고 있다. 그 이외의 한역본에서는 ‘artha’를 번역하지 않는다. 어쨌든 그 어떤 주석에서도 'artha'에 대해 별도의 설명을 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여기에 사용된 ‘artha’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eka(一)와 nānā(異)라는 2음절어를 ekārtha와 nānārtha라는 3음절어로 만들기 위해 동원된 調音語라고 생각된다.
또 不出을 의미하는 ‘anirgamam’에 사용된 ‘nir’ 역시 ‘agamam’이라는 3음절어를 4음절의 Pāda로 만들기 위해 삽입된 조음사일 뿐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구마라습은 ‘nir’(away)의 의미를 살려 ‘anirgamam’을 ‘不去’(don't go)가 아니라 ‘不出’(don't go away)이라고 번역하였다.
다음과 같은 게송에 등장하는 saṃvidyate 역시 vidyate와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Śloka 형식에 맞추기 위해 음절수를 늘이려고 ‘saṃ’이라는 접두사를 첨가한 것일 뿐이다.
tasmānna pratyayamayaṃ nāpratyayamayaṃ phalam/
saṃvidyate phalābhāvātpratyayāpratyayāḥ kutaḥ//(MK., 1-14)
그러므로 緣에서 만들어지거, 非緣에서 만들어진 결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과가 없는데 연이라거나 비연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겠느냐?
아래의 두 게송에서 사용된 ‘nirmukta’와 ‘vi-nirmukta’ 역시 음절운을 맞추기 위해 선택된 용어로 그 의미가 다르지 않다.
rūpakāraṇanirmukte rūpe rūpaṃ prasajyate/
āhetukaṃ na cāstyarthaḥ kaścidāhetukaḥ kva cit//(MK., 4-2)
色이 色因에서 벗어나 있다면 無因의 色이 있는 꼴이 된다.
그러나 無因인 사물은 어떤 것이건 어디에건 존재하지 않는다.
rūpeṇa tu vinirmuktaṃ yadi syādrūpakāraṇam/
akāryakaṃ kāraṇaṃ syād nāstyakāryaṃ ca kāraṇam//(MK., 4-3)
반대로 만일 色에서 벗어나 <色의 因>이 있다면
결과 없는 因이 있으리라. 그러나 결과 없는 因은 없다.
이 이외에도 buddha(佛) 대신 사용되는 saṃbuddha(正覺者), pravṛtti(流轉) 대신 사용되는 saṃpravṛtti 등이 음절수를 늘이기 위해 채택된 단어들이라고 볼 수 있다.
⑷ 虛辭의 삽입
산스끄리뜨어의 불변화사 중 hi(really, because), ca(and), vā(or), tu(but) 등과 같은 단어는 그 본래적인 의미와 무관하게 단지 운율을 맞추기 위해 문장 중에 삽입되는 경우가 많다. 이를 허사(expletive)라고 부르는데 이런 용례는 ?중론? 도처에서 발견된다. 다음을 보자.
① ‘hi’의 삽입
‘hi’는 ‘왜냐하면(for), 실로(indeed), 예를 들어(for example), 오직(only)’ 등의 뜻을 갖는 불변화사인데, 이 중 ‘강조의 부사’(실로: indeed)로 쓰인 경우와 ‘허사’로 쓰인 경우를 명확히 구별하기는 힘들지만 다음과 같은 용례는 허사로 쓰인 것으로 생각된다.
pratītya yadyadbhavati na hi tāvattadeva tat/
na cānyadapi tasmānnocchinnaṃ nāpi śāśvatam//(MK., 18-10)
어떤 것이 어떤 것에 緣하여 존재하는 그런 상황 하에서 <실로> 그것이 그대로 그것인 것은 아니며 또 다른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 양자는] 끊어진 것도 아니고 이어진 것도 아니다.
pratyutpanno ’nāgataśca yadyatītamapekṣya hi/
pratyutpanno ’nāgataśca kāle ’tīte bhaviṣyataḥ//(MK., 19-1)
만일 현재와 미래가 <실로> 과거에 의존하고 있다면
현재와 미래는 과거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되리라.
nājātasya hi jātena phalasya saha hetunā/
nājātena na naṣtena saṃgatirjātu vidyate//(MK., 20-14)
아직 생하지 않은 결과는 이미 생한 원인과 <실로> 함께 하지 않는다. [아직 생하지 않은 결과가] 아직 생하지 않은 것과 이미 멸한 것과 결합함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 수의 게송에서 <실로>라는 번역어를 제거하여도 의미에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② ‘ca’의 삽입
‘ca’는 ‘그리고(and), 그러나(but), 확실히(certainly)’ 등을 의미하는 불변화사이지만, 허사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다음을 보자.
na ca vyastasamasteṣu pratyayeṣvasti tatphalam/
pratyayebhyaḥ kathaṃ tacca bhavenna pratyayeṣu yat//(MK., 1-11)
따로 따로건 모두 합해서건 연들에 그 결과는 없다. 연들에 없는 것, 그것이 어떻게 연들에서 비롯되겠는가?
이 게송에서 ‘ca’는 전반부와 후반부에 각각 1회 등장한다. 앞의 ‘MK., 1-7~MK., 1-10’까지의 게송에서 인연, 연연, 차제연, 증상연의 四緣 각각의 실재성을 논파한 다음에 MK., 1-11이 등장하기에 전반부에 등장하는 ‘ca’의 경우 ‘그리고’라는 번역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후반부에 기술된 ‘ca’는 그 어떤 의미로 해석해도 어울리지 않는다. 후반부는 ‘yat(n) na pratyayeṣu tat kathaṃ pratyayebhyaḥ bhavet’로 재배열할 수 있는 ‘yad ~ tad …’ 형식의 문장인데, ‘ca’가 kathaṃ과 bhavet 사이에 삽입이 되어 있기에 ‘그리고’, 혹은 ‘그러나’ 등의 뜻을 가질 수가 없다. 따라서 후반부에 쓰인 ‘ca’는 음절수를 맞추기 위해 삽입된 허사라고 보아야 한다.
pratītya yadyadbhavati tattacchāntaṃ svabhāvataḥ/
tasmādutpadyamānaṃ ca śāntamutpattireva ca//(MK., 7-16)
緣에 의해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건 그것은 自性으로서는 적멸이다. 그러므로 生時도 적멸이고 또 생도 마찬가지다.
이 게송에서 ‘ca’는 후반부에 두 번 등장하는데, 마지막의 ‘ca’는 ‘그리고’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에 쓰인 ‘ca’는 음절수를 맞추기 위한 허사이다. ‘ca’의 본래적인 의미 그 어느 것으로 번역하여도 의미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③ ‘vā’의 삽입
‘vā’는 ‘혹은(or)’을 의미하는 불변화사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게송에 쓰인 ‘vā’에서는 그런 의미가 도출되지 않기에 모두 음절수를 늘이기 위해 삽입된 허사로 보아야 한다.
siddhaḥ pṛthakpṛthagbhāvo yadi vā rāgaraktayoḥ/
sahabhāvaṃ kimarthaṃ tu parikalpayase tayoḥ//(MK., 6-7)
또는 만일 <貪慾>과 <貪慾人> 양자가 서로 다른 각각의 존재로 성립해 있다면,
그대는 무슨 目的으로 기어이 그 양자가 결합된 존재라고 상정하는가?
prahāṇato na praheyo bhāvanāheya eva vā/
tasmādavipraṇāśena jāyate karmaṇāṃ phalam//(MK., 17-15)
(見道의 四諦 관찰을 통한 끊음인) 斷에 의해 끊어지지 않고 실로 修道에 의해서 끊어진다. 그러므로 不失法에 의해 업들의 과보가 발생된다.
④ ‘tu’의 삽입
‘tu’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을 의미하는 불변화사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게송에 쓰인 ‘tu'는 그 본래적 의미를 살려 이해할 수가 없다.
kutaścidāgataḥ kaścitkiṃ cidgacchetpunaḥ kva cit/
yadi tasmādanādistu saṃsāraḥ syānna cāsti saḥ//(MK., 27-19)
만일 그 무엇인가가 그 어디에서 와서 다시 그 어딘가에서 그 어디로 가는 것이라면, 그렇기 때문에 윤회는 시작이 없는 꼴이 되리라. 그러나 그런 일은 없다.
4. ?중론? Śloka의 번역
지금까지 우리는 용수가 ?중론?을 저술했을 때 Śloka라는 시형식에 맞추기 위해, 어순을 바꾸어 장음과 단음의 배열을 조절하기도 했고, 관례적 용어를 음절수가 다른 異音同義語로 교체하기도 했으며, 접두어를 부가하거나 hi, ca, vā, tu와 같은 虛辭를 적절한 위치에 삽입함으로써 음절수에 조정을 가했다는 점에 대해 알아보았다.
언어는 음운, 통사, 의미라는 세 가지 층위를 갖는다. 음운이란 언어의 ‘소리의 차원’을 가리키고, 통사란 ‘의미를 가진 단위들의 결합’과 관계되고, 의미란 문자 그대로 ‘문장의 의미’이다. 저술가는 자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어떤 ‘의미’를,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언어의 ‘통사’(syntax) 규칙에 맞추어 ‘문자나 음성’으로 나타내게 된다. 저자가 표출하고자하는 ‘문자나 음성’이 정형시의 형식을 가져야 한다면 저자는 애초의 의미를 크게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 형식에 맞는 韻文을 창출해 내려 할 것이다. ?중론?의 Śloka 역시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저술되었다.
그런데 Śloka가 되기 위해서는 총 16음절이라는 음절의 수도 지켜져야 하지만, 일정한 위치의 음절이 일정한 장단을 가져야 한다는 규정도 지켜져야 한다. Śloka는 음절수에 제약도 있지만 그와 함께 일정 위치의 음절이 갖는 聲調도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漢詩에 대비된다.
그러면 이러한 Śloka를 타국어로 번역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의미가 정확히 번역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가능한 한도 내에서 그 형식도 복원되면 좋을 것이다.
?중론? Śloka의 경우, 한역에서는 五言古體詩로 번역되고, 티베트에서는 마지막에 Synalepha를 갖는 3 Pāda의 詩로 번역되었다. 다음은 귀경게 중의 八不에 대한 티베트역문이다.
'gag pa med pa skye med pa, chad pa med pa rtag med pa/(無滅無生, 無斷無常/)
'ong ba med pa 'gro med pa, tha dad don min don cig min//(無來無去, 非異義非一義//)
이렇게 한역자든 티베트역자든 운문은 자국어의 운문의 형식을 빌어 번역하였다. 그러나 ?중론?은 물론이고, 다른 불전을 번역할 때, 우리는 아직 이 점까지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중론?을 우리말로 새롭게 번역할 경우, 시조나 가사와 같은 음절시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의미 번역의 경우 우리는 구마라습에게서 가장 뛰어난 번역을 보게 된다. ?중론? 귀경게 중의 八不을 번역할 때 한역이든, 티베트역이든 다른 모든 번역자들은 범문의 배열을 그대로 번역하였지만 구마라습은 저자의 의도까지 파악하여 번역하였다. 八不 중 前 四不의 경우 원문은 anirodham-anutpādam-anucchedam-aśāśvataṃ/(不滅不生 不斷不常)의 순으로 ?반야경?의 관례적 배열과 반대로 되어 있지만, 이것이 Śloka 형식에 맞추기 위해 이루어진 불가피한 도치였음을 간파한 구마라습은 산스끄리뜨 원문에 대한 축자역을 넘어서 용수의 의도를 그대로 복원하여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이라고 한역하였던 것이다. 第4 觀五陰品 第7偈에서 ‘citta’를 心이 아니라 識이라고 번역한 것, 第15 觀有無品의 주석문에서 prakṛti를 svabhāva와 마찬가지로 自性이라고 한역한 것 역시 구마라습의 이러한 통찰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구마라습은 원문의 축자역을 넘어서 작자의 원 뜻에 보다 충실한 번역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는 Śloka라는 시형식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었기에 그러한 번역이 가능했을 것이다. 앞으로 ?중론?의 산스끄리뜨문을 우리말로 새롭게 번역할 경우 우리는 이렇게 저자의 의도를 간파하여 번역해 내었던 구마라습의 번역 태도를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Śloka 형식에 맞추기 위해 가해진 불가피한 조작들을 과감하게 제거하고 용수의 참 뜻을 살리는 번역!
5. 맺는 말
?중론?은 Śloka라는 산스끄리뜨 정형시로 쓰여져 있다. Śloka는 게송의 문장이 전후 각각 16음절이 되어야 한다는 제약과 함께, 일정한 위치의 음이 일정한 장단을 가져야 한다는 제약 역시 갖는다. 따라서 이렇게 형식적 제약이 많은 시송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文意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단어의 도치, 변형, 삽입 등 많은 조작을 가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조작을 통해 산출된 ?중론?의 게송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번역하기 위해서는 문의와 무관한 조작들을 과감하게 제거한 후 작자인 용수의 애초의 의도만을 채취하여 이해, 번역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검토해 보았듯이 Śloka 운율을 맞추기 위해 ?중론?에서 용수는
총 4가지 방식의 테크닉
을 사용한다.
‘anutpādam-anirodham’(불생불멸)과 같은 관례적 불교용어를 ‘anirodham-anutpādam’(불멸불생)으로 도치시키기도 하고,
‘주어 + 동사’라는 통상적 어순을 어기고 운율규칙에 부합되도록 단어들을 재배열하기도 한다. 필자는 이를
‘어순의 도치’라고 명명하였다.
또
음절수가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은 단어의 경우는 그 의미는 같지만 음절수가 다른 동의이음어로 대체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온 중 식의 원어이며 3음절어인 ‘vijñāna’가 2음절어인 ‘citta’로 대체된다든지, 유위법의 三相 중 生을 의미하는 2음절어 ‘jāti’가 3음절어인 ‘utpāda’로 교체되었던 것, 또 adhipati(增上) 대신 adhipateya를 사용한 것 등이 그 예이다. 또, 음절수를 늘이기 위해 접두어를 첨가하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었다. buddha(佛)와 saṃbuddha의 혼용, vidyate(존재하다)와 saṃvidyate의 혼용 등이 그 예이다. 마지막으로 hi, ca, vā, tu와 같은 허사를 삽입하여 음절수를 늘이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이런 네 가지 방식의 조작들이 단지 Śloka의 음절수와 장단을 맞추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지 각 게송의 의미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점을 숙지하게 될 때 우리는 원저자인 용수의 의도에 부합되는 보다 정확한 번역을 할 수 있을 것이다.
Abstract
The process of composing Ślokas of Madhyamaka Kārikā
and translation of them
Kim Sungchul
Dongguk University(Gteongju)
Madhyamaka Kārikā is composed of Ślokas. Śloka is a kind of Sanskrit verse form. If a Sanskrit poem is to be a Śloka, it should satisfy several formal requirements. Śloka consists of 16 syllables and some syllables must have regular verse rhythm. So it is not so easy to insert profound philosophical thought into such a formal Ślokas. But Nāgārjuna expressed his Madhyamaka philosophy by Ślokas.
In composing Ślokas of Madhyamaka Kārikā, Nāgārjuna inverted the location of some words to rearrange the phonetic length of each syllables and he changed some technical terms with new words of different syllables and added prefixes to some terms and inserted some expletives like ‘hi’, ‘ca’, ‘vā’ and ‘tu’ to increase syllables.
The examples are as follows. While composing Eight Negations Nāgārjuna changed the traditional sequence of ‘anutpādam-anirodham’ to ‘anirodham-anutpādam’ to accommodate the verse rhythms to the phonetic rules of Śloka. Vijñāna is replaced by two-syllables word citta in verse 4-7. The word ‘saṃvidyate’ found in ‘MK., 1-14’ is an example of adding prefix to increase syllables. In verses 18-10, 19-1, 20-14, 1-11, 6-7, 17-19, some expletives are inserted.
So when we translate Madhyamaka Kārikā, we should keep in minds these transformations and try to restore the original intention of Nāgārjuna. Among old translators Kumarajīva showed a fine example of this trial.
⑴ 어순의 도치
⑵ 단어의 교체
⑶ 단어의 변형
⑷ 虛辭의 삽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