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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與猶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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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與猶堂

VIS VITALIS 2016. 5. 3. 13:14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의 다산 생가에 가면 ‘여유당(與猶堂)’이라는 정약용 선생의 당호를 만나게 된다. 이 당호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여(與)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猶)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라는 대목에서 따온 것으로 조심조심 세상을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담고있다고 한다


여유당(與猶堂)과 사의제(四宜齊)
[기고] 제주시 기획예산과 청렴행정팀장 김문형
데스크승인 2016.02.17  12:16:31시사제주 | sisajeju@sisajeju.com  

  
 
여유당(與猶堂)은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 정약용(1762-1836)생가에 있는 서실 이름이다. 사의재(四宜齊)는 전남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한 다산이 처음 거처한 주막집 토담방 이름이다.

1800년 봄 남인계열인 다산은 자신을 둘러싼 노론계열의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노자’의 말을 빌려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호를 짓고 침거했다.

‘여(與)여!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유(猶)여!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 하거라’하였으니, 안타깝도다. 이 두 마디 말이 내 성격을 치유해 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 무릇 겨울에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 들어와 뼈를 깎는 듯 할 터이니 몹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

다산은 겨울 내를 건너듯이, 사방의 이웃이 자신을 감시하는 것처럼 매사를 조심했다.

이랬음에도 불구하고 11세로 즉위한 순조(1790-1834)대신 수렴청정한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1801년 1월 10일에 사학(邪學, 천주교)엄금을 하교하여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실은 집권세력 노론 벽파의 남인과 시파 숙청이었다.

다산은 1801년 신유박해로 경상도 장기현으로 귀향을 간다. 그 해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장기현에서 다시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유배객 다산에게 거처를 내줄 이가 없었다. 고맙게도 읍내 동문 밖 주막집 노파가 토담집 방 한 칸을 내 주었다.

1803년 겨울에 다산은 노파의 토담집 공부방을 ‘사의재(四宜齊)’라고 이름 지었다. ‘사의재(四宜齊)’는 “네 가지를 마땅히 하여야 할 방”이다. 정약용이 거처하는 방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은 ‘생각과 용모와 말과 몸가짐’네 가지를 흐트러짐 없이 하여 지난 3년간의 고초를 털어 버리고 이제 다시 출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리하여 다산은 18년 동안 ‘목민심서’‘경세유표’등 수 백 권의 저서를 냈다.

과거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선비나 문인들이 자신이 머무르는 자리에 의미를 부여하고 청렴을 다짐하는 현판이나 현액을 문 위에 걸어두고 그 곳에 머무르는 뜻을 세상에 내보이고 또한 스스로 잊지 않으려했다.
여유당(與猶堂)과 사의재(四宜齊)처럼 우리도 마음속에 현판을 굳게 새겨 삼가기를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듯, 그리고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 하여야 함은 물론 항상 몸가짐을 흐트러짐 없이 해야 할 것이다. 이게 시민을 위한 올바른 공직관일 것이다. 



‘여’는 의심이 많고, ‘유’는 겁이 많은 동물이다. ‘유’라는 짐승이 하도 겁이 많아, 무슨 바스락 소리만 나면 겁을 먹고 나무위로 기어 올라간다. 그런데, 정작 올라가 놓고는 내려오지도 올라가지도 못하고 그냥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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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초상 <사진=위키피디아>

노자(老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과거의 훌륭한 선비들을 일컬어 “신중하기(與)는 겨울에 내를 건너는 듯하고, 삼가기(猶)는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 하듯 한다”고 묘사했다. 그러니까 겨울에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뼈를 에듯하므로 아주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건너려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유’는 사방의 이웃이 자신을 엿보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부득이한 일조차 감히 행하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